호주 역사상 가장 중요한 판례
짧은 역사이지만 호주에서 가장 중요한 판례를 꼽으라면 단연 마보(Mabo)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호주 원주민들의 토지소유권을 인정받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18세기 후반 호주에 이주하기 시작한 이후 호주 땅은 법적으로 `주인없는 땅'(테라 널리우스·Terra Nullius) 즉 “무주지”라는 개념을 적용해 종전부터 대륙에 살던 원주민의 존재를 무시하고 유럽인이 이주해 오기 전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땅과 마찬가지로 간주했다.
당시 원주민에게는 토지권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이곳저곳을 옮겨다녔기 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호주의 원주민들은 아보리진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호주 대륙에서 5만년 이상을 살면서 자신들의 관습, 문화, 법을 구전으로만 전해왔기 때문에 기록된 증거가 없었다. 또한,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기 때문에 토지권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호주 땅은 먼저 발견하는 자가 임자라는 발견자의 원칙(doctrine of discovery)이 법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호주의 영연방정부가 원주민들이 신성시 하는 땅에 대하여 나발코라는 광산회사에게 토지임대를 허용하였고, 욜구(Yolngu) 원주민들이 그 땅을 보호하기 위하여 법원에 제소를 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영연방이 나발코에게 부여한 토지임대는 관습법에서도 인정하는 원주민의 권한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 영.미 관습법(Common Law)은 원주민의 권한이 유럽인 정착이 시작될 때 존재하였고 그 이후에도 유효하다고 인정되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에서 블랙번 판사는 무주지에 평화로운 정착을 통하여 이루어진 호주에서는 원주민권한을 인정하는 관습법을 호주법의 일부로 형성하지 않았다고 판결하였다. 블랙번 판사는 호주대륙은 황량하고 경작되지 않은 무주지라고 판시하면서 이때의 “황량하고 경작되지 않은 무주지”란 원시상태의 사회로 거주하고 있는 비문명화된 원주민들의 거주지도 포함된다고 판시하였다. 그러므로 유럽인 정착시 적용된 법에 따라 점유권에 의한 토지소유권이 인정된다며 호주법에는 원주민권한을 인정하는 그런 법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후 1977년과 1979년 그리고 1982년에도 원주민 운동가들에 의하여 무주지 개념이 잘못 적용되었다며 호주 주권에 대한 도전이 계속되었지만 모두 패소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호주의 연방 대법원인 High Court가 호주 대륙이 정복지인가 정착지인가는 바르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문을 열어 두었다. 이 계기를 바탕으로 1992년 마보사건에서 나발코의 판결이 뒤집히게 된다.
1982년 에디마보와 다른 4명의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전통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땅의 소유권을 확인 받기 위하여 퀸즈랜드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10년 넘게 끌다가 1992년 마보와 그 원주민들 땅에 대한 소유권은 퀸즈랜드 식민지가 합병되기 이전부터 그 원주민들의 것이라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리게 된다. 이 판결은 이후 모든 원주민들의 토지소유권 청구소송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이로써 호주의 `테라 널리우스’ 즉 무주지 개념은 폐기됐고 그동안 사실상 무시됐던 원주민들은 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온전하게 주장할 수 있는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됐다.
유네스코는 2001년 마보판결 관련 자료와 기록 등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마보 판결은 호주에서 원주민과 유럽 출신 백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만든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다인종·다문화 국가인 호주의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고 사회적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극적인 노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속적인 사회통합 노력의 일환으로 호주 사법부에는 법 적용 과정에서 원주민의 문화적 특수성을 고려하기 위한 특수법원과 전문판사가 있으며 원주민에 대한 형벌을 정할 때 원주민 부족장의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최근 외국인 유입이 늘면서 다문화 가정도 점차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호주의 경험과 정책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현재 한국은 2001년 2만5천명이 불과했던 국제결혼 이민자들이 2020년 기준 16만 8천명이 넘었다. 그러다 보니 노인만 남았던 한국의 농촌이 이제 시집온 외국인 주부와 다문화 가정 신생아들로 활기를 되찾고 있으며, 귀화자들의 창성창본(創姓創本)으로 몽골 김씨, 길림 사씨, 태국 태씨 등 전에 없던 `새로운 가문’이 속속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호주 등지에서 이미 1970년대에 입법화하여 시행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이 한국은 아직도 혈통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보수층의 반대로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차별 없는 평등한 다문화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귀화자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적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다문화를 수용하는 한국인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고 더불어 이를 뒷받침하는 사법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